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라이트 형제 (문단 편집) == 미국을 넘어서 == 조국에서의 푸대접과 형 윌버의 죽음으로 슬픔과 절망에 빠진 오빌은 다른 형들인 로런스, 토머스와 같이 미국을 떠난다. 슬픔을 떨치고자 그는 비행기 생산에 전력을 다했고 더 나은 발전을 위하여 연구했으며 프랑스 및 독일, 영국, [[네덜란드]]와 멀리 [[아르헨티나]]를 오고가면서 비행기 홍보를 했다. 오빌은 [[1918년]]도에 [[1911년]] 모델B형을 마지막으로 조종하고는 비행기를 조종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여러 항공 위원회에서 우대받으며[* 1918년이면 [[제1차 세계 대전|비행기가 국익에 막대한 도움이 된다고 인정받게 된 이벤트]]의 막바지이다. 그 4년 동안 항공기의 위상은 말도 안 되게 뛰었다. 분야의 개척자로서 우대 안 받는 게 이상하다.] 위원으로 활동을 했었는데, 그중에는 [[NASA]]의 전신인 NACA도 있었으며, 28년간 몸을 담았다. [[1928년]] 오랜만에 미국으로 돌아온 오빌은 오랫동안 자신들을 곤경에 빠뜨렸던 불구대천지 원수 커티스가 사업실패로 부도에 빠지자 그간 모아온 돈으로 커티스의 생산공장을 인수하면서 [[인생의 승리자|복수에 성공했다]]. 이것이 바로 [[1929년]] [[7월 5일]]에 출범해서 [[노스캐롤라이나]] 주 데이비슨에 본사를 두고 지금도 운영중인 커티스-라이트(Curtiss-Wright) 사인데, 마음 같아서는 [[나 먼저 원리|라이트-커티스라고 짓고 싶었겠지만]] 커티스가 자신과 [[견원지간]]이긴 했어도 그간 "비행기 개발" 관련으로 마케팅을 훨씬 많이 해 온 쪽은 커티스였고 그 덕에 비행기 하면 커티스라는 이름이 대중에 많이 알려졌기에, 오빌은 커티스 이름을 앞에다 두는 것이 [[신의 한 수|인지도와 점유율 면에서 훨씬 긍정적이라고 판단]]하여 일부러 자기 이름을 뒤로 양보해서 실리를 추구한 사명을 짓는다. 되레 라이트 형제를 사기꾼으로 몰며 소송을 남발하던 커티스는 회사마저 넘어가자 눈앞이 캄캄했고, [[역관광]] 당한 후 오래 못가 1930년 [[화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간 해온 행보를 보면 [[인과응보]]다. 일설에는 커티스가 [[랭글리]] 박사처럼 죽을 때 후손들에게 라이트 형제를 쓰러트려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하지만 확실치는 않다. 커티스의 비행기 공장을 넘겨받고, 그간 잃었던 로열티도 인정받아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은 없었으나 오빌은 미국이 자신들을 외면한 것을 잊지 않았다. 심지어 오빌은 [[1933년]] 키티호크에 세계 최초 동력비행 기념비를 세우고 3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도 주로 유럽 측 자금으로 지을 정도였다. 세월이 지나 [[1943년]]에 비행 최초 4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를 미국에서 조촐하게 지냈다.(2차대전 때문에 프랑스와 영국같은 나라는 정신이 없었기 때문) 이젠 로런스와 토머스, 캐서린[* 오빌은 캐서린과 사이가 나빠진 상태였다. 캐서린은 [[1926년]]에 결혼을 했는데, 오빌은 이에 크게 분노하고는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않고 얘기조차도 하지 않으려 했다. 토머스가 고집을 부려 캐서린이 죽기 전에 겨우 만났다.] 같은 다른 형제들도 모두 죽었기에 홀로 자리에 참여한 오빌은 인터뷰로 한 말로 여전히 미국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영국과 프랑스, 독일, 그리고 네덜란드, 벨기에... 유럽 각지에서 나(오빌)와 세상에 없는 윌버 형에게 훈장과 표창장을 주고 명예 시민, 명예 교수, 명예 학자 자리를 주며 인정했지만, 조국 미국은 그래본 적이 없다." 참고로 세계 최초 동력 비행기인 플라이어 1은 바로 영국자연사박물관에 전시되었는데 오빌이 스스로 영국에 임대 기증한 것이었다. 단, 조국인 미국에서 원한다면 언제라도 돌려준다는 조건을 달아서 언젠가 미국이 자신들을 알아줄 것이란 전망을 했다. 1944년 4월 19일 [[록히드 마틴|록히드]] 항공사의 [[록히드 컨스텔레이션 시리즈|록히드 컨스텔레이션]] 두 번째 생산분이 캘리포니아 주의 버뱅크(Burbank)에서 워싱턴까지의 거리를 6시간 57분으로 주파했다. 이 비행기를 조종한 사람 중 한 명이 [[하워드 휴즈]]였었다. 돌아오는 도중 이 비행기는 라이트 비행장에 멈춰섰고, 오빌은 생애 마지막 비행을 했다. 잠깐이나마 조종간도 잡았는데, '비행기의 날개 길이가 내가 처음 날았던 때보다 길어졌군.'[* 컨스텔레이션은 전폭이 37.49미터에 이르는 초거대 레시프로 여객기이다.(초기형인 L-049 기준)][* 라이트 형제의 플라이어 1호는 최초 비행에서 12초 동안 37미터를 비행하였다.]이라는 말을 남겼다. 오빌은 2차대전의 대규모 폭격의 피해를 보며 이러한 말을 하기도 했다. >"우리 형제는 세계의 번영을 가져다줄 발명품을 원했으나 우리가 틀린 것 같소. 물론 나는 우리 형제의 항공기 발명을 절대 후회하지 않지만 그 누구도 그것이 초래한 파괴의 원인 중 하나인 나보다 슬플 수는 없을거요. 나는 항공기가 마치 [[불]]과 같은 것이라 생각하오. 나는 그 '불'로 인한 [[전쟁|모든 끔찍한 피해]]에 대해 후회하고 있지만 그 '불'로써 할 수 있는 수천가지 좋은 일을 생각하면 인류 전체에게는 이득이라고 생각하오." [[1948년]] 1월 30일, 오빌은 고향인 오하이오 주 데이턴 시에서 눈을 감았다. 향년 76세.[* 미국보다 시간이 빠른 [[인도|다른 나라]]에서는 위대한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위인]]이 암살 당하였다.] 첫 비행을 한 지 만으로 44년 만이었다. 며칠 전부터 혼수상태이던 그의 유언은 다음과 같았다. >'''"바람은 높아......이제 날 수 있겠어."''' 마치 옛날 40여년 전을 회상하듯, 그 비행기를 띄울 때 모든 걸 잊고 비행기 연구에 전념하고 드디어 하늘을 날 때 벅차던 그 시절을 되새기며 눈을 감은 것으로 보인다. [[말(동물)|말]]과 [[마차]]가 다니던 시대에 태어나 항공 시대를 열었던 오빌은 [[초음속]] 시대의[* 오빌이 사망하기 3개월 전인 1947년 10월 17일 [[척 예거]]가 [[X 실험기 시리즈|벨 X-1 실험기]]를 타고 음속 장벽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태동기를 직접 목격한 산 증인이었다. 윌버와 오빌 모두 결혼을 하지 않아[* 윌버는 '''[[솔로부대|비행기와 아내 모두에게 쓸 시간은 없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자식은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